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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오면

고니 개인전: 노란 카나리아

PAGEROOM8 2022.3.4 - 3.27

글. 안소연


 

❉ 나는 이 겨울을 기억할 테다. 뜨거운 해를 손으로 막고 얼굴에 드리운 작은 그림자로 몸 속 깊숙이 배어 있는 서늘함을 다시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여름이 오면, 나는 더운 바람에 얼굴을 대고 천천히 녹고 있는 얼음처럼 바닥에 누워 깊은 겨울의 어둠 속에서 몸을 가눌 수 없었던 이 시간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아직 오지 않은 여름을 기다리며, 나는 이 계절이 한 계절을 지나 다음 계절에 남겨놓을 것들을 미리 기억해 본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 바다를 건너온 바람이 지나갈 때, 나는 창문 틈 사이로 내게 스며들어온 차가운 겨울 바람을 기억할 테다. 나뭇잎 사이로 가루처럼 부서지는 초여름의 저녁 해를 보면서, 나무로 된 책상 한 쪽에 켜놓은 초가 오후 내내 타고 있던 냄새를 나는 또 기억해낼 것이다.

 

❉ 지는 해가 마루를 미지근하게 달구고 눈은 뜨거워져 해를 등진 채 몸으로 검은 그늘을 만들어 본다. 하루 종일 전기로 돌아가는 바람이 마주보고 있는 얼굴처럼 아낌없는 시선을 내어 주는 동안, 새장 속 두 발 달린 노란 카나리아의 목소리는 눈부신 창을 넘어 내게 닿지 못했다. 뜨거운 여름, 차갑게 죽은 새에 대한 기억은 삶을 스쳐가는 수수께끼 같은 모순이라 마음 속에 어떤 흔적만 남겼을 뿐, 애도할 만큼의 서사를 지어낼 수 없었던 거다.

   투명한 물처럼 두 손에 받아 올려 놓고 예뻐 했던 마음, 멀리 날아가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 귀여운 소리로 내게 노래 불러주기를 바라던 마음, 노란 깃털이 태양처럼 영원할 거라 믿었던 마음, 나의 비좁은 마음 속은 노란 유령들이 사는 작은 무덤 같다.

   <카나리아의 모든 것>(2022)은, 구름만큼이나 흔하고 공허하게 들리는 “노란 카나리아”라는 말의 부스러기 같은 잔해에 가깝다. 날개를 옆구리에 붙이고 새장에 가만히 앉아 있는 노란색 카나리아를 머릿속에 떠올려 보는 일은,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을 그리는 것만큼 평화롭고 진부한 이미지로 되풀이 되어 끝나기 쉽다. 그렇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다르다. 소설에서 1인칭의 주인공이 “이게 그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전부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카나리아의 모든 것>이라는 그림의 제목은 그린 이가 “이게 그 카나리아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전부입니다”라며 미안함이 묻은 목소리로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음에 대해 고백하는 장면을 떠올려 준다. 영영 알 수 없게 된 “그 일”에 대해 이렇게 밖에 그릴 수 없었다는 공허함과 그리움을 알려 준다.

 

❉ 한여름의 뜨겁고 눈부신 창문을 사이에 두고 다른 소리, 다른 온도, 다른 냄새, 다른 호흡, 다른 시선을 끝내 알아차리지 못해, 꼿꼿했던 형태가 중력을 견디지 못해 차갑게 무너져 내릴 위태로운 순간에도 마음을 돌이키지 못해, 나와 너 사이에 영영 알지 못할 일이 하나 생겨 났다.

   불투명한 유리창만큼이나 어떤 질감만 가진 채 가려진 그 계절 그 시간의 기억은, 새장 속에 있던 샛노란 카나리아의 존재와 그것의 부재 사이의 간극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그것이 그가 그림을 그린 이유였으며, 아마도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일 지도 모른다.

❉ 그는 나를 옆에 앉혀 놓고 죽은 카나리아에 관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들려줬다. 그 기억은 죽은 카나리아, 그러니까 카나리아의 죽음에 관한 것으로 그 새가 노란색이었다는 것과 죽었다는 것과 자신이 잘 돌보지 않아서 그랬다는 것 말고는 없었다. “(어린) 내가 돌보지 못해서 그 노란 새가 죽었다”는 설명은 내 귀에 큰 파동을 일으키거나 검은 동공을 흔들어 놓을 만큼은 안됐다. 하지만 그 사건은 홍차에 적신 마들렌 만큼 강렬하게 삶의 오랜 시간(long-temps)을 관통해 “다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못할” 것들에 관한 기억을 그에게서 불러냈으며, 그 기억의 잔해들은 새로운 날들의 서사를 채울 “사랑”과 “돌봄”으로 그와 연대했다.

   나는 이 글의 제목을 한참 전에 “여름이 오면”이라 지어 놓고, 글의 맨 마지막 문장으로 쓰면 좋을 것 같아 “울고 싶다”라는 네 개의 음절에 대한 어떤 믿음을 가지고선 제목 아래 적어 놓았다. 그의 작업실에서 난로를 등지고 벽에 걸린 <카나리아의 모든 것>을 보면서, 나는 “울고 싶다”는 (누군가의) 속마음을 막연히 생각했다. 어디서 읽었는지 모를 문장에서 “황금 십자가 모양의 동공”이라는 표현이 떠올랐고, 그것은 기억과 관련해 아주 추상적이면서 동시에 인간적인 슬픔과 두려움에 대한 것임을 알았다. 여름이 오면, 모든 것들이 살아나 환하고 뜨겁게 반짝이는 것을 (다시) 보게 되면, 이 모든 생명의 끝자락에서 마주해야 할 “죽음”의 잔해를 나는 미리 기억해낼 지도 모른다. 언제나, 어둠은 울고 싶을 만큼 무섭다.

 

❉ 바닥에 놓인 <눈물 젖은 손수건>(2022)은 언덕을 올라오며 내내 얼굴에 스쳤던 머리 위의 하늘을 금세 떠올리게 했다. 종말의 날, 화석처럼 땅으로 고개를 숙이고 하늘을 올려다 보는 거짓말 같은 형상과 함께였다. 나는 그 형상을 그가 알려준 책 속에서 한번 더 상상했다. (“수레를 만드는 목수의 집 앞에는 웬 여자가 꼼짝도 않고 햇볕을 받으며 앉아 있었다. 얼굴은 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잠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눈에 눈물이 고여 그녀의 모습이 일그러져 보일 때까지 계속 쳐다보았다.”)

   투명한 물컵 위에 반듯하게 접어 놓은 파란색 손수건은, 책상 위에 엎질러진 물과 빨간 벽을 비스듬히 타고 흐르는 빗물과 숲의 나무에서 소나기처럼 퍼붓는 사과 열매와 노란 새의 유령을 허공에 매달아 놓은 투명한 발과 하나하나 연대하여 각각의 의미를 불확실한 어둠의 공포 속에서 충실한 파수꾼처럼 지켜준다. 마치 세상의 끝에서 한 사람의 죽음을 목격하며 “그것이 만약 죽음이었다면 죽음은 매우 갑작스럽고도 부드럽게, 사랑스럽다고 말해도 좋을 방식으로 닥쳐 왔던 것이다”라고 말한 소설 속 주인공처럼, 손수건에 스며든 파란 눈물은 어떠한 실체와 연대하는가에 따라 서사의 흐름과 농도를 바꿀 만한 각각의 질감과 깊은 감정을 알게 한다.

   그는 지나쳐온 <카나리아의 유령>(2022)을 다시 기억하여 돌아보게 하면서, 죽은 카나리아의 유령을 파란 “눈물”로 엮어 부드럽고 사랑스럽게 안과 밖의 경계를 “여는” 발을 만들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카나리아의 유령>은 새로운 세계의 경계에 놓인 유연한 “벽”으로서, 삶의 재앙과도 같은 부재와 고립의 두려움 속에서도 “다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못할” 것들, 이미 죽음 속으로 사라진 것들을 또 다시 맞이하며 환대하여 꿋꿋이 지키도록 한다.

 

❉ <카나리아의 복수>(2021)는 같은 제목으로 서로 다른 두 개의 그림이 있다. 하나는 가로로 긴 그림이고 하나는 정사각형 모양의 캔버스에 그린 그림이다. 한 손에 총을 든 사람이 숲을 달리고 있는 <카라니아의 복수>는, 그가 마를렌 하우스호퍼(Marlen Haushofer, 1920-1970)의 『벽(Die Wand)』(1963)을 읽고 어떤 비약적인 공감과 연대를 바탕으로 그리게 되었다고 들었다.

   하우스호퍼의 소설은 “오늘, 11월 5일에, 나는 이 글을 쓰기 시작한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400 페이지에 가까운 책은, 챕터를 나누는 소제목도 상황을 전환시켜주는 행간도 하나 없이 소설 속 2년이 넘는 시간 속에서 계절의 변화에 따른 단 한 사람의 고립된 삶을 보여준다. 자기도 모르게 어느 날 갑자기 숲 속에서 끝을 알 수 없는 벽에 갇혀버린 주인공은 자신을 찾아든 개와 고양이와 소를 자신의 공간에 들여 돌보기 시작한다. 감자와 콩을 재배하고, 소의 젖을 짜고, 그들을 먹이며, 서로의 시선을 나눈다. 사랑과 돌봄으로 그들은 벽에 갇힌 채 여러 계절을 함께 보냈고, 그 사이에 누군가는 새끼를 낳았고, 알 수 없는 죽음을 맞았고, 그것은 한 사람의 글로 기록됐다.

 

내가 글을 쓰기로 결심한 이유는, 어둠이 내리는 하늘을 응시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순간에 글쓰기가 나를 지켜주기 때문이다. 나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 사방에서 공포가 밀려든다. 그러나 공포가 나를 덮쳐 집어삼키기만을 기다리고 싶지는 않다. 나는 어두워질 때까지 글을 쓸 테고, 이 새롭고 서툰 작업에 피로해진 나의 머리는 텅 빈 채로 잠을 받아들일 것이다. 아침은 두렵지 않다. 다만 어스름한 기나긴 오후가 두려울 뿐이다.

  

   그가 그린 노란 카나리아는 소설 속 여러 존재들과 겹쳐진다. 소설 속 주인공의 독백과 마주한 그는, 기억 속 카나리아의 죽음에 관한 죄책감과 두려움을 지나 카나리아의 죽음에 대한 스스로의 (인간다운) 복수를 그려냈다. 그것은 1인칭의 서사로 구축되기 보다는, 수수께끼 같은 그림 속에서 성찰적인 그리기의 형태와 그리기의 행위를 통해 아주 천천히 인내심을 가지고 보여진다.

   하우스호퍼의 책은 “그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로 끝난다. 여전히 알 수 없는 삶의 고립 속에서, 공터에 찾아든 하얀 까마귀에 대한 사랑과 돌봄을 예고하는 이 문장은, 주인공이 글쓰기를 마치면서 “나는 이것이 끝이 아님을 안다. 모든 것이 계속된다”고 말한 한 사람의 불안과 고독과 희망을 동시에 알게 한다.

 

❉ 나는 그(의 그림)에 대한 이 글을 쓰는 내내, (지금도), 정확하지 않은 글자들로 어떤 뚜렷한 형상을 적어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유예>(2021)를 보고, 내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을 때와 같다. 벽에 그렸다 지운 그림의 흔적, 엎질러진 물, 자신을 감싸 안은 몸, 종이, 창문, 벌레, 나무 바닥, 이 모든 파편적인 것들이 서사 없이 나를 어떤 순간에 고립시켜 놓는 것 같아, 손 쓸 수 없는 재난 속에서 동물을 돌보고 식물을 재배하는 마음으로 저 화면 위에 작은 형상들을 하염없이 (지웠다) 그려낸 그의 속내를 가늠해 볼 뿐이다. 나는 사랑과 돌봄, 그리고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그와 나누었고, 오랜 시간 삶에서 겪고 있는 깊은 고립과 두려움 속에서 그것을 뜨겁게 부둥켜 안은 채 글과 그림으로 지켜온 이 힘겨운 노동에 대한 서로의 믿음을 바라봤다. 여름이 오면, <카나리아의 모든 것>의 더운 바람과 “다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못할” 것들의 흔적을 유리창 너머로 마주하면서, 울고 싶었던 마음을 다시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202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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