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님께
고니 개인전: 바로 저 초원이라고 생각했다.
별관 2024.6.13 - 6.30
글. 모희
빌려주신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제 앞에 주어진 연약한 미래를 가늠해보았습니다. 약속된 마지막과 기꺼이 건네야 할 작별 인사와 안녕을 고할 순간들. 모든 불확실성 속에서도 이내 확언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이런 저런 모양의 헤어짐이라는 것을 마음에 새기면서요. 어쩌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과거가 아닌 미래라고 말하던 어느 소설가의 문장도 떠올렸습니다. 그럼에도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로” 끄떡없이 글을 쓰는 80대의 소설가 클로디 윈징게르처럼, 작가님의 지난 메시지에 대한 늦은 답을 씁니다.1)
“이제는 너무 늦어버린 일들이 무수히 많았다. 숨차게 하는 것들. 감정에 복받쳐 얼굴이 달아오르게 하는 것들. 눈물이 차올라 결국 얼굴을 적시게 하는 것들. 녹초가 될 정도로 일하게 하는 것들. 이제야 처음 겪는, 믿을 수 없는 일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겪는 일들. 그런 것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 기억들을 한껏 껴안았다. 그것들에 작별을 고하며 잠이 들었다.”2)
함께 나누고 싶던 많은 문장 중 특별히 작가님의 작업과 가깝다고 생각한 몇 개의 문장을 곱씹어 보았습니다. 누군가의 눈길이 먼저 닿은 문장을 뒤이어 읽어 내려가는 일은 꽤나 즐거운 경험이었어요. 저는 수많은 책 중 기어코 저와 닿은 책의 인연이 늘 신기하고도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책을 쓴 노년의 윈징게르도 머나먼 한국의 두 여성이 자신의 글을 나누어 보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겠죠? 참 신기한 인연이에요.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이 글도 작가님에게, 머지 않아 제가 모를 누군가에게 닿을 거라 생각하니 적잖이 망설여집니다. 그렇지만 그 미래를 선명히 기억하며 다시금 키보드를 두드려요. 기억할 미래는 끝내 못 이룬 과거가 되지 않으리라 믿으면서요. 안락함 속 불길함의 정서를 머금은 작가님의 그림에도 그런 미래를 기억하는 절박한 시선이 담겨 있습니다. 이미 결정된 과거와 아직 결정되지 않은 미래의 시점이 한 문장에 공존하는 프랑스어의 ‘전미래시제’처럼요. 이 독특한 시제가 암시하는 불완전한 현전성은 엎질러진 물과 곰팡이 핀 구두, 어둑한 밤의 미광과 같은 형태로 그림에 등장해요. 작가님은 사물이 남긴 잔상을 최대한 얕고 너른 표면에 그려내고자 덜어내고 쌓기를 반복하신다고 했어요.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캔버스 천 위에 안착한 수채 물감과 색연필의 입자들을 닦아내고, 다시 그리고 채워 나가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죠. 때문에 적어도 작가님의 그림 안에서 충만함과 결핍, 평안과 불안 같은 양가감정은 서로를 배반하지 않아요. 오히려 “등을 딱 맞대고” 각자의 자리를 지탱하죠.3) 훅 불면 날아갈 듯한 선과 점들이 실은 서로를 지탱하며 같은 화면 위를 촘촘히 수놓고 있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작은 위로가 됩니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작가님은 침착하고도 사려 깊은 태도로 작업에 임하고 싶다고 하셨어요. 그런 태도를 곧바로 사물에 옮긴 나무 부조는 고요하지만 끊길 줄 모르는 손의 궤적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작가님의 네모난 화면들이 저 밑으로 침잠하는 이미지와 같다면, 가까스로 평면에서 벗어난 부조들은 아무리 묻으려 해도 자꾸만 떠오르는 부표에 가까워요. 이 부표들을 따라 항해하다 보면, 속수무책으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작가님이 결코 놓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돼요. 마음에 드는 커피잔과 낡은 구두, 겁이 많지만 총명한 강아지 하루와 감명 깊게 읽은 소설책 같은 것들. 어떤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마주하고 싶은 얼굴들.
저에게 때때로 찾아오는 상실의 경험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구멍과도 같아서, 매일은 아니지만 매번 끝도 알 수 없는 밑으로 떨어지곤 했어요. 작가님은 어떠세요? 자주 삶과 죽음을 한데 겹쳐보는 작가님의 시선 앞에 상실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시장 한 켠에 놓인 <한 사람과 여섯 개의 손을 위한 테이블>(2024)이 그러한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결과물이라는 것을 강조해두고 싶어요. 작가님은 관을 운구하던 흰 장갑 낀 손과 손들이 나르던 관의 묵직함, 망자의 집을 한 바퀴 돌아 묘지로 가던 길이 기억에 남는다고 하셨어요. 그 기억을 더듬듯 테이블은 한 사람이 누울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 즉 ‘방’과 ‘관’을 지시하는 타원형의 합판과 이를 단단히 받치고 있는 여섯 개의 손-다리로 만들어졌어요. 저는 사람들이 여기 둘러 앉아 서로의 안녕을 묻고, 시간을 보내고,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거나 나무를 깎아 내고, 사랑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 이유들을 되새기면서요.
“죽는다면, 익숙한 방에서 죽고 싶다”는 말과 함께 제 생각을 묻던 작가님의 물음에 답한다는 것이 이렇게나 길어져 버렸네요. ‘어떻게’만을 생각하던 저에게 ‘어디서’를 묻는 질문은 어렵게만 다가왔어요. 그런데 이제는 ‘어떻게’와 ‘어디서’가 크게 떨어져 있지 않다는 걸 알아요. 심지어는 꼭 달라붙어 있다는 걸요. 작가님이 밤의 방 풍경을 그리며 그곳에서 죽기를 희망하는 것처럼, 저는 제가 글을 쓰곤 하는 사랑하는 것들과 가까운 곳에서 죽고 싶어요. 그곳이 구체적으로 어디가 될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분명한 것은 그 미래를 기억하며 보내는 오늘과 내일은 조금씩 달라질 것이라는 사실 뿐이겠지요. 저의 답이 작가님의 ‘어떻게’와 ‘어디서’를 견고히 하는 데에도 작은 도움이 되었길 바라며, 전시의 제목 앞에 생략된 윈징게르의 문장을 마지막으로 글을 줄입니다.
“나는 서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서 초원을 바라보았고 – 초원은 시간, 날짜, 계절에 따라 다채롭게 모습을 바꾸었다. – 바로 이곳이라고 생각했다. 전미래는 어떤 시점에서 이미 벌어져 있을 미래를 가리킨다. (…) 유일하게 시간을 앞질러 갈 수 있는 시제, 숨가쁜 시제, (…) SF소설에 가까워 믿기지 않을 시제. 나는 저기라고, 내가 죽어 뿌려질 곳이 바로 저 초원이라고 생각했다.”4)
모희 드림
1) 클로디 윈징게르, 『내 식탁 위의 개』, 민음사, 2023, p.386.
2) 위의 책, pp.59-60.
3) “이것 혹은 저것이 아닌, 모순적인 성질이 늘 등을 딱 맞대고 함께 있는 것이 세상의 진짜 모습이라 여기고, 이를 사람들과 공유하여 볼 수 있는 ‘회화’라는 형태로 만드는 일에 가치를 느낀다.” 작가 노트 中
4) 클로디 윈징게르, 위의 책, p.270.
2024.6.7.